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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7/2/2025

 
7.2.2025 원정훈

어제 상처받고 많이 힘들어하는 분들을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 모두 이런저런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하게만 살 순 없더라도, 너무 못되게 살지는 말자. 꼭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나쁜 사람은 되지 말자. 누가 나한테 잘못한 게 있어도, 왜 그랬는지 깊이 알지 못한다면 함부로 판단하거나 미워하지 말자.”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랑이 점점 식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내 마음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혹시 누군가로부터 ‘내 기준의 상처?’라고 여겨지는 일을 받더라도, 미움으로 물들지 않게, 그리고 다 이해할 순 없어도 내 안에 사랑의 본성이 손상되지 않게…

실존 Christian Existentialism

6/25/2025

 
6.25.2025 원정훈

하나님 앞에 선 인간 – 기독교적 실존주의에 대한 묵상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왜 살아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실존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 고통과 절망을 중심으로 이러한 물음을 던집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실존주의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coram Deo), 즉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초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마주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첫째, 인간은 단지 주어진 삶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형식적 신앙을 넘어, 우리는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둘째, 불안과 절망은 인간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피할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나 세상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절망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고 변화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는 그 자리가, 가장 진실한 신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과 선택의 삶이 요구됩니다. 기독교적 실존주의는 인간을 단순히 윤리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종교적 실존’으로의 전환을 강조합니다. 예를들어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고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실존적 믿음이 있습니다. 즉, 믿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넷째, 기독교적 실존주의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홀로 서 있습니다. 군중 속에, 제도 속에 숨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진실하게 서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 지난주일 설교 중
​
*한국 전쟁 기념일 입니다.(1950.6.25~)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아직도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많은 나라들의 평화를 위해 잠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만남2

6/4/2025

 
​6.3.2025 원정훈

여리고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삭개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한 존재였습니다. 그 역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사람들 사이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기만이라도 하려 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식사란 그저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존중의 표현이며 사랑의 수용입니다. 그 마음 깊은 사랑의 만남은 삭개오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고, 누구의 것을 속였으면 네 갑절을 갚겠나이다.” 그의 말에는 계산이 아닌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변화는 진짜였고,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그 만남은 삭개오 개인의 변화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뀌자, 여리고의 다른 세리들도 예수께 나오기 시작합니다. 변화된 삭개오 또한 또 하나의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다면, 누군가에게 또 한명의 선교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만남1

6/4/2025

 
​6.2.2025 원정훈

우리는 종종 사람을 피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마음이 불편해서, 예전에 상처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어서, 혹은 나와는 너무 다르다고 느껴서. 그렇게 우리는 피하고, 멀어지고, 외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십니다. 당시 유대인이라면 사마리아는 일부러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혼혈 민족이었고, 유대인들의 눈에 ‘부정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깨끗하고, 저들은 더럽다.” “나는 고상하고, 저들은 상종 못할 인간이다.” 스스로를 의롭다 여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밥 한 끼 나누는 일조차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땅을 피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중심에 들어가셨습니다.

정오의 햇살이 가장 뜨거운 시간,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왔습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나온 그녀.예수님은 바로 그 여인에게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단순한 부탁 같지만, 그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장벽을, 남성과 여성의 벽을, 죄와 수치의 담을 넘는 하나님의 손짓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를 아셨습니다.

남편 다섯,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녀 안의 깊은 목마름을 보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 만남을 통해 생수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갑니다."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그녀는 부끄러움을 자랑처럼 외쳤습니다.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가감 없이 꺼내며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녀는 그 마을의 최초의 선교사가 됩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만남이, 한 사람을 바꾸고, 한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작은 만남, 그 속에 하나님은 큰 계획을 담아두십니다.

남? 나!

5/11/2025

 
​2025.5.11 원정훈
“남 이야기할 것 없고, 남의 자식, 남의 집안 이야기할 것 없다. 그냥 내가 잘하면 된다.”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인데, 참 단순하지만 마음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남’을 봅니다. 남의 말, 남의 삶, 남의 성공, 남의 실패 등..  그 속에서 나를 비교하고, 낙심하거나 자만하거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세상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옛 철학자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나,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존재로서의 ‘나’를 아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방영된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애순이 어머니’, ‘애순’이와 ‘관식’의 사랑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서툴지만 진심 어린 사랑,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헌신, 기다려주고 품어주는 그 따뜻한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그림자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의 사랑 속에서 자랐고, 또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결국,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향해 손 내밀고, 기다려주고, 용서하게 됩니다.

“내가 잘하면 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안에 내가 서면 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바꾸려 애쓰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내 시선을, 내 태도를 주님께로 돌려서 참 평안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남’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주일이 되길 바랍니다.

빈 배

5/2/2025

 
혹시 지금 인생의 빈 배를 마주하고 계신가요?                 5.2.2025 원정훈
 
관계가, 일터가, 사명이, 심지어 믿음조차 공허하게 느껴질 때, 주님은 갈릴리처럼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조반의 은혜는 고난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네 옆에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눈 뜨기 힘든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 새벽에도, 주님은 먼저 일어나 숯불을 피우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주일 말씀 3)

그 자리

5/2/2025

 
그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님         5.1.2025 원정훈
 
새벽, 빈 배, 지친 마음…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십니다. 당시 갈릴리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입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제자들의 삶. 그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밤을 지새우며 애쓴 삶, 그런데 결과는 허무할 때 / 여전히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침묵이 아닌 아침 식사로 응답하셨습니다.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으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사랑의 초대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 21:12) 이 말은 곧,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위로이며, 이 시대의 사람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지난주일 말씀 2)

갈릴리 / 실패한 자들이 있는 자리

4/30/2025

 
4.30.2025 원정훈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깊은 후회와 자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택한 것은 다시 고기 잡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요 21.3)  한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길,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역과 비전…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너진 지금, 그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제자들 모두,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절망과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하고, 무기력하게 흩어진 그들. 다시 모였지만, 그 마음에는 두려움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혼란이 그들은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오히려 도망치듯 갈릴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실패했을 때, 꿈꾸던 사역이 무너졌을 때, 내 기대와 다른 현실로 인한 아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스스로에게 지쳤을 때,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방향도 보이지 않으며, 관계는 무너졌습니다. 마음은 지쳐서 ‘그냥 다시 고기나 잡자’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갈릴리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무너진 우리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다 실패했다고 느끼는 우리의 영혼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곳으로 찾아오십니다. (지난주일 말씀 1)

그들

4/23/2025

 
누가23.20–25       4.18.2025 원정훈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무리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반복적으로, 강하게, 끈질기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 짧은 한 문장은, 인간 본성의 깊은 어둠을 드러냅니다.
진리가 침묵당하고, 거짓이 외침 속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처음엔 이 ‘그들’은 예수 시대의 무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혹은 광장에 모인 군중들..
그러나 묵상하면 할수록 깨닫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은 오늘의 ‘우리’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도 그들과 같은 본성이 있습니다.
불의와 타협하려는 마음,양심의 침묵,                                                     
성공을 위한 거짓과 편법, 끝없는 욕망,
그리고 나의 안녕을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는 본성.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못 된 본성이 그분을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고백

4/6/2025

 
4.4.2025 원정훈

믿음의 고백

믿음은 단순히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입’을 통해 고백되며, 그 고백이 우리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며, 이 고백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시인한다"는 헬라어 단어인 ‘ὁμολογέω(homologeō)’는 "함께 말하다", "공적으로 인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와 고백의 의미
로마 제국 시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했고, 이는 그들의 신앙을 나타내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고백하며, 이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신념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종종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결단을 요구했으며, 그 고백은 단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
오늘날 우리의 고백
온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시대에, 우리의 믿음은 단지 주일의 예배 시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고백되어야 합니다. 직장 내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인님’이심을 성실과 정직으로 드러내고, 가정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함께 인정하며, 친구나 동료들 앞에서도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좋은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혼탁한 시대에 결코 관념이아니라, 실제가 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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