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이라는 단어는 한글자이지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원통하다’, ‘억울하다’, ‘원통하게 생각한다’(have deep resentment) 의 뜻이 있습니다. 과거 어른들의 경우 ‘우리 민족이 한(恨)이 많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겪으면서 억울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도 한(恨)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폭행, 성적차별, 사회적 부조리, 불이익등을 통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恨)이 없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겠지요...
에스겔35장은 ‘세일산’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세일산은 창36.9절에 보면 에서/에돔의 중심지였습니다. 즉, 야곱과 에서 / 이스라엘과 에돔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보면 에서/에돔은 늘 한(恨) 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유다가 망할 때 바벨론 편에 서서 기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도망자들을 잡아서 바벨론에 넘기고, 헤브론을 점령하기도 하였습니다. 에스겔35.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
그리고 당시 에돔의 모습을 구약 오바댜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 오바댜1.11-12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고 산다고 하면서 ‘한(恨)’을 품고 살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恨)을 품고 살다보면 우리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젠가 그 한(恨)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恨)’ Resentment 은 남도 아프게 하고, 나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기억 하십시오 예수님 십자가에서 우리 삶의 ‘한(恨)’또한 죽었습니다.